학교 종이 땡땡땡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걸음마를 떼면서 아프리카로 떠나왔던 아이들이 학교에 갈 정도로 컷을 때, 한국 동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교 종’, ‘태극기가 바람에’, ‘따르릉따르릉’ 같은 노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썩 즐거워하지 않고 은근 무시하는 분위기가 엿보였습니다. ‘한국 동요는 특별한 주제도 없고 의미도 없고~~(구시렁구시렁)’. 노래의 뜻과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항변이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동요에 무슨 심오한 의미를 꼭 담아야 하나요? 아무튼 아이들의 투정 어린 항변이 쏙 들어가고 ‘학교 종이~’ 노래 의미와 뜻을 마음 깊이 새긴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년 전입니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이웃나라 케냐의 대통령 선거로 촉발된 혼란이 심각한 폭동으로 악화되었습니다. 약 한 달 사이에 700명 이상이 죽고, 300,000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습니다. 긴급히 경찰력을 투입했으나 중립에 서야 할 경찰이 자기 부족 입장에 따라 각기 나누어져 혼란은 더 심해졌습니다. 치안 불안으로 나라를 잇는 육상 수단이 단절되고, 관공서, 시장, 학교 등의 업무가 중단되었습니다. 혼란의 불똥은 케냐와 인접한 우간다로 튀었습니다. 생필품과 휘발유 가격이 3~4배 치솟았습니다. 대부분의 수입품들을 케냐의 몸바사 항에서 육로로 공급받기 때문이지요. 상관없는 이웃나라가 폭동의 아픔을 함께 겪은 셈입니다. 가뜩이나 매년 초, 이 시즌은 아이들의 정서가 우울해지는 시기입니다. 성탄절이 낀 연말 방학(겨울이 없으니 겨울 방학은 아니랍니다)을 마치고 옆 나라, 케냐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기숙사 학교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지요. 부모와 집을 곧 떠나야 하는 아쉬움에 싱숭생숭한 아이들은 폭동 소식으로 마음이 더 심란해졌습니다. 급기야 ‘폭동으로 학교를 폐쇄하니 위험이 가라앉을 때까지 학교에 오지 말라’는 통보가 왔습니다. 무기 연기된 개학은 학교를 향한 하릴없는 기다림을 선물했습니다. 평소 방학이 끝나갈 즈음이면 말 수도 적어지고, 그렇게 먹어 대던 밥의 양도 줄면서 집 떠나기를 아쉬워했던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날마다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를 부르며 학교를 그리워했습니다. ‘아~ 학교에 가는 것이 이토록 신나는 것이구나, 이 노래의 의미를 확실히 알겠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입니다.


혼란은 3주가 지나면서 안정되기 시작했고, 약 한 달 늦게 새로운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개학을 애타게 기다리는 동안 주제가 없다 투덜대고 은근 무시했던 ‘학교 종이 땡땡땡~’의 문자적 의미와 뜻을 확실히 파악했나 봅니다. 그 해 처음으로 아이들은 학교에 대한 간절한 기대로 집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면 미국 정부에서는 학교에 남아있던 미국 선교사 가족들과 스텝들을 인도양의 항공모함으로 소개(疏開) 시키기로 했다더군요.
케냐의 폭동은 대통령 선거 개표가 갑자기 중단되고 일방적으로 현 대통령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극심한 혼란은 정치적 타협으로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종족 분쟁은 언제 다시 촉발할지 모르는 곳이 아프리카입니다. 분쟁 배후에는 권력자의 욕심과 종족 갈등, 강대국의 이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전(civil war)은 아프리카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주요 단어 중 하나이지요. 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았던 1993년, 매일 밤 자장가처럼 총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습니다. 우간다에서 십수 년을 끌어오던 LRA (Lord’s Resistance Army-신의 저항군)에 의한 내전은 UN과 이해 당사자 나라의 노력으로 최근 그 활동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우간다의 서부, 콩고 민주공화국 (구, 자이레)에서 일어난 새로운 반군 ADF (Allied Democratic Forces)의 활동으로 국경 지역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대규모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난민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평생 난민촌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이들 중 일부는 반군에 잡혀가 무서움과 죄의식 없는 잔인한 소년병이 되기도 하지요.


우간다의 북쪽 글루(Gulu) 지방을 방문했을 때, 반군에 붙들렸다 탈출한 형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온몸에 상처와 흉터를 가지고 있는 형제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 23)는 말씀을 온 생애를 바쳐 묵상했다 고백했습니다. 익숙한 성구이지만 공포와 죽음의 골짜기를 뚫고 온 형제에게는 생명과 위로의 말씀, 그 자체였습니다.

부패와 장기집권, 부족 간의 이해관계, 강대국의 이권, 빼앗을 권력과 자원 때문에 잠잠할 겨를 없는 아프리카. 제대하는 군인들로부터 회수되지 않아 통제 없이 방치되는 무기들, 넘치는 수량으로 싼값에 구할 수 있는 소총들, 수많은 총기 사고, 총기를 든 떼 강도, 단기 팀을 수송하는 버스를 향해 날라든 총탄을 겪으며 치안 부재의 아프리카를 처절하게 경험했습니다.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군사력과 무기, UN 평화 유지군에 의해 유지되고 지탱되는 평화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화해하고 복된 말씀이 누룩처럼 편만하여 넉넉히 유지되는 평화의 땅, 아프리카를 위해서…

총기를 소지한 강도, 불안한 치안을 극복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일구신 교민들은 개인 경호원을 두거나 당국의 허락을 받아 총기를 휴대하기도 합니다. 교민들은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는 선교사들에게 ‘총 하나 구해 놓으라’ 농담 섞인 조언을 하기도 하지요. 선교사가 총이라… 북쪽에 인접한 남수단에서 실제로 기관총 들고 반군들과 싸우며 복음을 전했던 미국 선교사 Sam Childers 같은 분이 있긴 합니다. 총으로 무장하고, 총격전을 통해 교회와 마을, 어린이를 지키고 구하는 이 분의 이야기는 2011년 [Machinegun Preacher]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먼 이곳까지 예수 사랑을 전하러 온 선교사가 총기를 휴대한다는 것은 똥지게 지고 장에 가는 것 같이 어색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우간다에서 20년 이상 살면서 매년 성탄절과 연말 즈음엔 유독 불안한 치안을 경험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금 돌아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는 심각한 자구책이었답니다. 그 하나는 제복 입은 경찰관들을 초청해 눈에 잘 띄는 낮에 함께 순찰하는 것이었고요(순전히 보여주기 식…). 또 하나는 운동회에서 쓰던 달리기 신호용 화약총을 구해 불안을 느낀 밤에 “땅, 땅” 허공에 쏘아 댄 것이랍니다(순전히 들려주기 식…). 화약총 소리로 화들짝 기선 제압을 노렸지만 놀란 건 동네 개들, 더 놀란 건 선교사 아내들이었답니다

최승암 (GMS 선교사) | uga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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