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 | 세번째

선택: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

제가 삶의 조건들에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가 제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들이 어떻게 제 인생에서 가장 축복된 순간으로 바뀌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제한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한된 삶은 일상의 연속이자 반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만 살아온 삶의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매일 의미있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일상은 별다른 변화없는 무의미한 시간들이 일일연속극처럼 계속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소설가 이영도가 『드라곤 라자』에서 말한 “마법의 가을”처럼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는 최고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최고의 순간이 우연히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진정 영향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우연이나 행운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눈물과 땀, 희생과 사랑이 뒤범벅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 최고의 순간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우리의 선택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2008 Sidus FNH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의 결승전의 감동을 재구성한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나 등장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는 영화에 맞게 다시 구성했습니다. 서울올림픽과 바르셀로나올림픽이후 점차 밀리기 시작한 여자핸드볼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메달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아테네올림픽에서는 본선 진출도 겨우 턱걸이로 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악조건 속에서 이뤄낸 결승 진출이었고 최종적으로 획득한 은메달이었습니다. 5개의 실업팀의 한국과 1035개의 실업팀을 보유한 덴마크와의 경기는 누가 보아도 덴마크의 확실한 우세였습니다. 결승 진출에 만족하며 우승은 포기한 채 경기에 들어섰다고 하여도 누구 하나 한국 여자 핸드볼팀을 감히 비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임순례 감독은 결승 경기 전 미숙이 남편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업 실패와 빚에 쫓겨 자살을 선택한 남편이나 덴마크를 상대로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미숙의 상태나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숙의 남편은 자살을 시도 끝에 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인생의 한 지점에서 포기를 선택한 남편에게 아내인 미숙은 다음과 같은 얘기했습니다.

“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마.”

마치 제 상황처럼, 이 영화는 삶의 조건만으로 판단하면 포기하고 절망할 만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대표팀의 감독로 복귀했지만 리더십 부족과 이혼 경력으로 선수로 강등된 혜경, 불임으로 고생하는 정란, 생활고에 시달리는 미숙 등 이들의 이야기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며 서로를 감싸 주고 함께 일어서도록 서로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땀 흘리며 눈물 흘리며 이를 악물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 그들 생애 가운데 최고의 순간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좋은 삶의 조건이나 주변 여건들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를 선택하는 대신 최선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이 반드시 최고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결과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과정 가운데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을 함께 바라 본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최선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최고의 순간이 한 번은 우리 생애에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느낄만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제 삶의 조건들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비록 제게 주어진 삶의 조건과 시간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지만, 저는 포기를 선택하는 대신 최선을 선택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만으로도 저는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제게 주어진 모든 여건들과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제가 포기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제 삶의 상황이 지금 제게 주어진 삶의 순간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가 제 삶을 희망과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며, 제 삶의 순간들에 최선을 다한다면 저는 결과와 상관없이 제 삶의 조건들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들이 제 마음까지 지배하고 무너뜨리게 내버려두는 것은 정말 싫었습니다. 만일 어떤 더 나은 여건들이 제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나와 이익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감동과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서 보이신 삶의 모습은 지금도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 밝은 빛으로 머물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이 세상의 빛으로 비취길 소망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빛에 잇닿아 있어 우리의 희생과 수고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그리스도가 머물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렇게 이루어져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의 상황처럼, 제가 처한 상황도 전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되자, 우리 가족이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향에서 거제도 누나 집으로 전학 가기 직전,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은 흩어져야했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 역시 고향을 떠날 때 비슷하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넷째 누나는 멀리 강원도 있는 먼 친척의 농장으로 갔습니다. 어머니까서 돌아가셨을 때, 막내 누나는 부산에 있는 한 야간 여자상업 고등학교에 가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했고 저는 거제도에 있는 둘째 누나 집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유일하게 남은 막내 아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남아있는 우리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향 집까지도 동네에 있는 친척 아저씨에게 팔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났을 때,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제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며칠 전, 몇 몇 사람들이 제게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제게 진지하게 조언을 하거나 충고를 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를 격려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조언들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정보들 중에 제게 도움이 될만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조언들 중 하나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그 조언이 제게 설득력있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부는 중학교 가서 잘 하면 돼!! 초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성적이 더 중요해.”

비록 이 조언이 그다지 제 상황에 현실적이거나 적절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에는 무엇인가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조언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공부는 중학교 가서 잘 하면 돼.”

저는 그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이 진실로 옳은 말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실제로 그 말은 제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록 그 조언을 한 형이 공부를 잘 한 사람도 아니고, 교육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저는 그 조언을 진리의 말씀처럼 제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꼭 붙잡았습니다.
또 다른 조언을 해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너보다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 봐. 네가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

이 말은 부분적으로 옳으면서도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는 말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해서 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처럼, “나만 힘든 건 아니지만, 네가 더 힘든 걸 안다고 해서 내가 안 힘든 건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말도 제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일 수 있지만, 최소한 그 말은 제게 감사할 이유를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저는 부모님이 계신 친구들보다 불리한 여건에 있었습니다. 또한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 의지할 수 있거나 도움을 요청할 부모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말이 제게 준 도움은 제게도 감사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보다 더 나은 상황이라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제게도 주어진 것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지만 제게 큰 도움을 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옆집에 살고 있었던 친구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오셔서 제 등을 토닥여 주셨습니다. 등을 토닥여 주시는 따뜻한 손길에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조언이나 이야기가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조언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품고 그 상황을 견뎌낼 희망의 말들과 이야기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들을 제 마음에 간직했고 그 이야기들에 담겨 있는 희망을 따라서 나아갔습니다.

중학교 1학년 겨울 쯤에 우연히 과학고등학교에 대한 안내 전단지를 발견했습니다. 수학 선생님에게 빌린 “재미있는 수학여행” 책에 과학고 진학에 대한 안내 전단지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과학고등학교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작은 누나 집에서 지내던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꿈꿀 수 없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간다는 것은 대학 진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전혀 안되었기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는 제가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선택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모두 제가 유명한 공고에 가서 기술을 익혀 취업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계를 만지거나 다루는 일을 잘 하지도 못했고,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그나마 잘 할 수 있는게 공부 외에는 제게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과학고 진학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저는 과학고에 진학할 수 있을만큼 공부를 탁월하게 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전교 230명 정도 되는 거제도 중학교에서 전교15등 내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고등학교를 지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요건도 갖추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교 3퍼센트 이내의 성적이거나 모든 과목이 “수” 이상의 성적을 받은 학생이 과학고 지원을 할 수 있었는데 제 성적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학고를 준비한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공부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해 공부한 결과 전교 1등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의고사는 거의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1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과학고에 진학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거제도 안에서 우리 중학교가 평균 성적이 괜찮은 편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창원이나 진주에 있는 중학교에 비해서 학력수준이 높지 않았습니다. 거제도 전체에서 과학고에1명 가는 것도 힘들 때 였습니다. 탁월하게 공부를 잘한다고 하던 옆 중학교 전교 1등들도 한번도 과학고에 진학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갔을 때 모든 상황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 시작된 3월에 저는 감기에 심하게 걸렸습니다. 심한 감기에 걸려서 쉬어야 하는데도, 공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서 쉬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쉬면 영영 과학고 진학은 불가능할 것 같아서 쉬지도 않고 계속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빨리 감기에서 나으려고 약국에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부를 해야 하니 감기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약을 강하게 지어 주세요.”

병원에 가서 저렇게 말하고 실제로 약을 강하게 먹고 쉬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그만 쓰러져 버렸습니다. 며칠 공부 못하는 것을 아까워하다가 수십 배 이상의 시간을 날려야 했습니다. 3월 초부터 5월 초까지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더 신경이 쓰였고 그럴수록 몸은 더 쇠약해졌습니다. 어쩌다 학교에 등교하면 꼭 시험치는 날이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시험을 보았고 성적은 전교 30등 밖으로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저는 마음에 평안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학교 앞 서점에서 명심보감을 사서 한 장씩 읽기도 했고 누나가 준 염주를 붙잡고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5월이 되자 건강도 회복되었고, 마음의 걱정과 염려도 내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과학고 진학을 하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더 이상 걱정하거나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일단 건강을 회복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과학고 진학 자체를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5월 중순에 학교를 다시 복귀해서 빠지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더 이상 제게 큰 기대를 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도 저에게 큰 기대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단 건강하게 몸을 회복하고 남아있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복귀 후 처음 본 모의고사에서 다시 전교1등을 한 것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제게 기대하지 않았던 그 때의 첫 모의고사 성적은 내게 다시 아주 작은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뒤로 중학교 3학년 때 치른 모든 모의고사에서 전교1등을 했습니다. 비록 그 성적이 과학고 진학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자신에게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을 때, 다시 과학고 진학을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거제도에서는 입시 대비용 책을 구할 수 없어서, 부산에 있는 큰 서점에 과학고 준비 문제집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구입한 후 준비하였습니다. 여전히 가능성이 높지 않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중학교에서 제가 합격할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신생 중학교였던 우리 중학교에서 1회 입학생인 제가 떨어지면, 학교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더 많았습니다. 가족들도 제가 과학고 대신 공고에 지원하길 원했습니다. 과학고와 공고 모두 인문계 고등학교 연합고사 시험보다 지원 일정이 빨랐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들 입장에서는 가능성이 높지 않은 과학고에 지원했다가 실패하면 공고도 못 가게 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원서를 써 주지 않으려 했고, 가족들도 반대했습니다. 제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저조차도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포기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정답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포기하면 그대로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들을 설득할 명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던 다른 친구들은 다른 걱정할 필요없이 입시 준비만 하면 되었지만, 저는 가족들을 상대로 한달 가까이 논쟁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형과 누나를 설득하고 학교 선생님들께 원서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중1 겨울부터 포기하지 않고 준비한 과학고 입학 시험을 꼭 치뤄보고 싶었습니다. 어른들 말처럼 공고에 가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저는 보장된 것이 없고 떨어질 확률이 더 높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떨어진 다음에 길은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입시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했지만, 저를 믿고 격려해 주셨던 많은 선생님들과 주변 분들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말씀들을 언제나 마음에 꼭 붙들려고 했습니다.


1993년 11월 둘째 주일에 치른 과학고 입학시험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과 함께 진주에 갔는데, 저는 혼자 가야해서 친구 부모님들과 함께 진주로 갔습니다. 시험 전날 과학고에 시험에 관한 설명을 들으러 갔을 때, 학교 안에 걸어다니는 재학생들의 모습은 마치 사람이 아닌 신선과 같은 존재들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입시생들이 몰려 들어서인지 그날 진주에서 여관방을 구하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터미널 근처의 낡은 여관방을 친구 부모님들께서 구하셔서 다같이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시험 보러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험 치기 전날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마져 들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다음 날 시험에서 제게 주어진 기회를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시험을 치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직 교회를 다니기 전이었지만 누군가 제 기도를 들을 것이라 생각하며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야기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에 참여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인생과 자아가 하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야기가 있는 삶이란 이야기에 참여하여 스스로 이야기를 구현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진실되고 믿을만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이야기에 참여하여 구현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삶에 대해서 하우어워스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직 신앙이 없던 제가 붙들고 있었던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들만큼 신실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야기에 참여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이야기를 구현하려고 했습니다. 짧은 이야기들과 조언들에 담긴 희망을 따라서 살았고, 이야기들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의 이야기를 제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따라 살아가는 제 삶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언제라도 제가 포기하면 제 삶의 이야기는 거기서 부정적으로 끝이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론적으로 내러티브와 덕윤리를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 대신 최선을 다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기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제 마음에 붙들고 있던 희망의 이야기들이 제 마음에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형성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즉, 저는 제가 마음에 품은 이야기를 구현해내는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구현된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서 저의 습관과 성품을 형성하는 순환 구조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덕윤리 이론은 몰랐지만, 저는 단지 결과와 상관없이 제 삶의 이야기를 제가 포기해서 끝나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말들과 이야기들 속에서 저는 제가 스스로 제 삶의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의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이 제게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선택하기로 결심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글 | 강성호(isaiah97@gmail.com)캐나다 맥매스터 신학대학(Mcmaster Divinity College) 박사과정 학생입니다.서울대학교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신학대학원과 미국 미시간주 칼빈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유학을 나오기 전 1년 동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간사를 하였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성품 윤리와 리차드 니버의 윤리적 방법론으로 한국 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의견 0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