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되는 줄 알았어요 - 교회와 회사의 공통점

만약 교회가 세상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는 무슨 명목으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아빠는 목사님이시다. 10여 년째 성도의 수가 증감이 거의 없는,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미자립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계신다. 아빠가 어느 날 그러셨다. 목사만 되면 다 되는 줄 알았다고. 목사가 되고 나니, 교회는 박사에, 유학까지 요구했다고.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수능만 잘 보면, 대학교만 잘 가면, 학점 관리랑 대외활동 잘하면, 스펙을 쌓기 위해 자격증, 어학연수, 인턴, 각종 아르바이트, 공모전 수상경력만 있으면 그러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문을 통과하는 삶의 연속. 그 끝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그냥 모두들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지 내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따라야 하는 시스템이 바로 사회이며 세상이다.

그 시스템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자신도 없고, 잘 알 수 없다. 어느 쪽에도 확신이 없다면, 다수가 따르는 길이 더 안전해 보이니까, 그렇게 시스템 속에 순응해서 살아간다. 세상의 시스템은 그렇게 돌아간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 그런 시스템의 흔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교회까지 세상의 시스템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목사님에게 도대체 왜 박사학위와 유학을 요구하며 자격조건을 따지는 것일까.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필요 이상의 학위를 요구해서, 결국 세상과 똑같이 '스펙을 경쟁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 화살이 성도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마치 면죄부를 사야지 천국을 갈 수 있는 그 옛날 시대처럼, 우리는 교회에 가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 날이 오는 건 아닐지 문득 두려워졌다.

교회는 어떤 곳일까?

교회는 이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인 동시에, 또 나눠져서 구석구석 하나님을 알려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교회는 어떤 곳일까?

나는 태어나보니 아빠가 목사님이었고, 엄마가 사모님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태신앙인이다. 그야말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찬양을 들었고, 나오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목회자 자녀가 흔히 그런 건지,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많은 교회와 학교를 다녀봤다. 그럴 때마다 '교회' 자체에 대한 애정보다는, 교회에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관심이 갔다. 지금 다니는 교회는 곧 떠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건 아니니까.

이렇듯 나에게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었으며, 교회를 가는 목적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인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 세상의 어떤 공동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명히 다른 곳이었다. 세상 다른 공동체 안에서와 달리, 교회에서의 나는 무언가 애쓸 필요가 없었다. 단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지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학교는 나에게 항상 무언가를 요구했으며, 지켜야 할 것들,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준비물을 챙겨야 했고, 수업 시간을 잘 지켜야 했으며, 쉬는 시간이 지나서 화장실에 가도 안됐다. 급식실에 갈 때는 뛰어가면 안 됐고, (요즘은 모르겠지만) 반찬을 남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흔히 교회에 다니는, 특히 모태신앙인이라면 자주 볼 수 있는 '순종적 태도'가 이미 내 안에 습득되어 있었기에, 학교에서의 이러한 것들을 지키는 게 나에게 어렵지 않았다.

학교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향해 점수를 매겼으며, 계속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규칙을 지키지 못해도 평가를 받았고, 지켜도 평가를 받았으며, 언제나 나는 학번과 점수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 점수를 높이고, 등급의 숫자는 낮추기 위해, 그게 내 존재 가치와 상관이 있는 것처럼 애써야 했다. 항상 좋은 평가를 받고, 좋은 사람이기 되기 위해서, 내가 쓸모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곤두서 있는 생활이 바로 학교에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 안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규칙들이 많다. 특히 나 같은 목회자 자녀에겐 더했다. 차라리 학교에서의 나는 수백 명의 학생들 중 한 명이었지만, 교회에서의 나는 학교와 비교도 안 되게 작은 집단의 성도이자, 목회자 자녀였다. 따지고 보면, 교회는 목사님 딸인 내게 요구하는 것들이 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예배 시간을 잘 지켜야 했고, 설교를 들을 때 다리를 꼬면 안 됐으며, 한여름에도 예배당은 맨발로 가서는 안 됐다. 심지어 너무 새것 티가 나는 옷이나 물건을 가져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사치를 부린다며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게 사모님인 엄마의 생각이었다. 지금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안 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학교는 다른 곳이었다.

교회는 학교와 달리, 내가 무언가 지키지 않았을 때, 나에게 어떠한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에 의하면, 사소한 규칙을 지키지 않다고 해서 조금의 꾸지람 말고는 내 인생의 전반적인 과정에 피해를 주거나, 나를 낙인을 찍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나는 교회에서 나의 능력이나 나의 어떠함을 증명해내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성도로서, 목사님 딸로서 해야 할 일들과 섬김이 있다. 나는 예배 시간마다 종종거리며 눈이 침침하신 성도님들 찬송가를 찾아드린다거나, 교인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예배를 인도해아하고, 사춘기에 접어든 후로 말을 듣고는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남동생을 비롯한 친구를 맡아 공과공부를 해야 한다. 얼떨결에 사회자에, 선생님에, 사회복지사의 역할까지 해내야 하는 느낌이 문득 들 때도 있다.

이렇듯 교회 안에서도 학교에서 만큼이나 지키고, 해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를 못 다닌다거나, 교회 안에서 밀려난다거나,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사회에서는 낙인이 찍혀야 할, 이미 밀려났을 그러한 일과 잘못들도 교회 안에서는 '용서'와 '사랑' 이 있었기에 포용되었다.

물론 죄를 합리화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벌하시는 분이니까. 그러나 그 후의 대처가 달랐다. 만약 세상에서 죄를 지었다면, 그다음에는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는 그러지 않았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해지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공동체 안에 사랑의 기운이 퍼져나갈 수 있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래서 목사님인 아빠에게 최근 들은 말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흔히들 그러지 않는가. 대학 가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라고. 그런데 목사님이 되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라는 말이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니 확실히 충격이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공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곳에서, 세상과 똑같은 시스템을 따라 하며 적용하고 있었다니.

만약 교회가 세상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는 무슨 명목으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10년째, 지금의 교회를 다니면서 배운 것은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진심으로 하나남과 살아가는 삶, 하나님만 붙잡고 버티는 삶이었다.

물론 '교회에 다닌다고' 알아서 삶이 버텨지고,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갈 때 삶의 중심 ‘가치’ 을 찾아갈 수 있다. 그 중심 가치는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란 걸 말해주기 때문에,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미리 대비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공포 영화를 볼 때, 무서운 장면이 어디서 나오는지 미리 안다면, 나오기 전에 눈을 감고, 귀를 막을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소리가 조금 들리더라도, 아무 준비 없이 볼 때와 비교했을 때, 충격이 확실히 다르다. 이렇듯 무서운 일을 미리 대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미리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다. 그 준비는 바로 삶의 중심 가치를 정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난 그때그때 달라, 잘 모르겠어, 라고 말해도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이 생활할 때 사소한 부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관찰해보면,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그 가치를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 앞에 쌓인다. 나의 모든 순간들이 그냥 흘러가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돌아보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 속에 흔적으로 반드시 남아있다.

이렇게 각자에게 쌓인 하나님과의 시간들을 서로 존중해주고, 서로가 경험한 순간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넌 하나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니,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눴어, 라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고,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영적 전쟁이 끝날 날을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그때까지 세상에 살아가는 서로를 끊임없이 격려해줘도 모자랄 마당에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적용하다니,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몇 달 전, 교회에서 들은 우리 목사님, 우리 아빠의 설교 중 한 예화가 떠오른다. 하나님이라는 왕이 거지 옷을 입고 살아가는 왕자님, 공주님을 데려다가 누더기를 벗긴 뒤, 씻기고, 먹이고, 꾸며주고, 새 옷을 입혀주었는데, 굳이 다시 성 밖으로 나가서, 길바닥에 찾아가서 거지 옷을 다시 주워 입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고.

나는 지금 그것을 지켜보는 것 같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시 세상의 원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끌어오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 걸까. 세상에서 볼 때에 이미 가진 것이 없는 나는, 이제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글 | 이희라(huirah@kakao.com) 예수님을 믿는 마음 외에 가진 게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큰 것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굳이 생각해보면 맛있는 음식,
가만히 있는 것, 말하기, 쓰기를 좋아합니다.  
브런치 주소 https://brunch.co.kr/@huirah

의견 0

댓글이 없습니다